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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灌燭寺 石造彌勒菩薩立像)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灌燭寺 石造彌勒菩薩立像)

소개

* 국보 제 323호(2018년 4월 20일 지정)

*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동 254

내용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불리우며 그 높이는 18.21m

이른다.

고려 광종 19(968)에 공사를 시작하여 38년 후인 목종 9(1006)에 완성되었다

이 석불은 자연의 화강석 암반위에 허리아래부분, 상체와 머리부분을 각각 하나의 돌로 조각하여 연결하였다.

머리에는 구름무늬 같은 머리카락이 조각되어 있고, 그 윗부분의 관까지는 정으로 다듬은 흔적이 있으며, 관은 8각형으로 깍았다. 그 위에 2중의 보관을 올리고 관의 네귀에는 청동제 방울을 달았다.

얼굴은 이마가 좁고 턱이 넓은 역제형(逆梯形 : 사다리꼴)으로 눈이 옆으로 길게 돌아갔고 코, , 귀는 모두 크다. 굵은 목에도 3()가 있고,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며, 좁은 어깨에는 법의가 걸쳐져 있고, 양손은 가슴까지 들어올려 한손에는 꽃가지를 들고 있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데 아미타여래의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표현한 듯 하다

불상의 규모는 물론 토속적인 조각이라는 점에서 단연 대표적인 작품으로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 설

1. 고려 광종때 사제촌의 한 노파가 고사리를 뜯으로 반야산에 갔는데 어디서인지 어린애 울음소리가 들려 가보니 큰 돌이 땅에서 솟아올라 사위에게 알리어 관가에 알리어 보고되고 왕에게 까지 상주하였던 바 신하들과 의견을 나누니 이는 석불이 될 조짐이라 의견이 일치되어 혜명대사에게 명해 불상을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가 너무나 거대하여 사람의 힘으로는 세울 수 없어 고심하던 차 하루는 혜명대사가 사제촌을 거닐고 있을 때 동자들이 나타나 강가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큰돌 하나를 세우고 모래로 덮은 뒤 굴려 올려서 가운데 것을 세우고 또 모래로 덮은 뒤 굴려 올려서 맨 윗부분늘 세운뒤 모래를 파내니 부처 모형만 남는 것이었다.

이 장난을 보고 미륵을 세울 수 있는 방법을 깨달은 혜명대사는 거대한 석불을 건립하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이 석불이 완성되자 중국의 승려가 광체나는 빛을 따라 찾아와 예불을 올리었다 하는데 중국의 가주에도 큰 석불이 동쪽을 향해서 서 있는데 광명이 동시에 동과 서에서 서로 통하니 관촉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2. 고려 때 북쪽 오랑캐들이 우리나라를 자주 침략 했다. 어느날 오랑캐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압록강가에 집결해 있었다. 오랑캐들이 배가 없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스님 한사람이 삿갓을 쓴 채 마치 얕은 냇물을 건너듯이 다리만 걷어 올리고 건너오고 있었다. 그러자 오랑캐 두목은 보아라, 저기 중이 건너오는 곳이 얕은 모양이니 그곳으로 강을 건너자하고는 진군 명령을 내렸다. 멋모르고 강으로 뛰어 들어간 오랑캐들은 수심이 깊어 모두 물속으로 빠져 죽고 말았다. 화가 난 적장은 그 스님을 찿도록 명령을 내렸다. 적장은 스님을 향해 칼을 빼어 내리쳤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중은 간 곳이 없고 그 스님이 쓰고 있던 삿갓 한쪽만 떨어져 있었다.

그때 은진미륵은 온몸에서 땀이 흘러 내렸고 미륵이 쓰고 있던 갓 한쪽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은진미륵이 스님으로 화신하여 압록강에 나타나 국난을 막았던 것이다.

민간에서 은진미륵은 내세에 올 구원의 부처이자 호국의 부처로 믿어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말 학자 목은 이색은

 

마읍(馬邑) 동쪽 백여리

시진 고을 관촉사

큰돌부처 미륵은 내 나온다하고

땅에서 솟아났네

눈같이 흰 빛으로 우뚝이 서서

큰 들을 굽어보니

농부들 벼를 베어 보시하네

돌부처 때때로 땀흘려 군신을 놀라게 했다 하니

어찌 구전(口傳)만 이겠는가

나라의 기록에 실려 있다네 (신증동국여지승람 은진현 불우조)

출처 : 논산의 문화재, 논산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