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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노강서원 강당

논산 노강서원 강당

소개

국가지정 보물 제1746호(2011년 12월 30일 지정)
논산시 광석면 오강길 56-5

내용

 노강서원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큰 건물로 중앙의 3칸이 대청으로 꾸며져 있고, 그 좌우에 1칸씩 온돌방을 두었으며 온돌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고 툇마루 밑으로는 함실아궁이를 두고 있다. 덤벙주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사용하고, 기둥위에 공포가 짜여져 있다. 기둥사이 창방 위에는 화반형의 초각반을 배치하였고지붕은 겹처마의 맛배지붕이지만 박공 아래 부분에 내림 지붕을 덧붙여서 건물의 측면을 보호하고 있다.

사당은 전면의 1통간을 개방하여 앞퇴를 두고, 바닥에 전()을 깔았다.

공포는 강당과 비슷한 이익공 외출목으로 구성되고 우설(牛舌)과 내부 양봉(樑奉)은 형태가 강당과 다르다. 기둥사이에 배치된 화반형은 2개씩이고 내부는 마루를 깔았다.

 노강서원의 구내는 상.2단으로 정지되었으며 전면에는 강당, 후면에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강당이 있는 일곽은 입구에 외삼문을 세우고 강당 앞마당의 좌우에 동서양재가 배치되었고, 사당 주위는 근래에 자연석 담장을 돌리고 전면에 문도 설치 하였다.

 노강서원은 조선 현종 13(1672)에 문곡 김수항, 광성부원군 김만기, 좌상 조사양, 영상 여성제, 우상 신익상, 민유중 등의 발의로 창건하여 숙종 1(1675)에 팔솔 윤황 선생을 주벽으로 노서 윤선거 양성생을 봉안 하였다.

그 후 숙종 8(1682) 4월에 사액을 받고 석호 윤문거를 추배하였으며, 경종 3(1723) 10월에 명재 윤증을 추배하였다.

숙종 43(1717) 정쟁으로 윤선거, 윤증 부자의 관직이 삭탈되면서 사액 현판까지 철거되었다가 경종 2(1722) 두 사람의 관직 회복과 더불어 현판이 다시 내려졌으며 정조 5(1781) 중수하였다.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도 보존되었던 전국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윤황은 노성을 본거지로 삼아 살아온 파평윤씨의 대표적 인물이며 추향된 3인은 그의 자손들이다. 윤문거와 윤순거는 형제간으로 윤황의 아들이며 윤증은 윤선거의 아들이 된다.

학맥으로 보면 윤황은 성혼의 문인이고 윤선거는 김장생의 문인이자 충청 오현에 드는 서인의 거두이며 윤증은 소론의 영수이다.

현존하는 노강서원지에 의하면 노강서원 건립과정에는 각 지역 수령과 사족, 그리고 파평윤씨 가문은 물론이려니와 향촌사회 구성원들의 협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즉 노강서원을 건립할 때의 부조록에 의하면 각도의 지방관과 향교서원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파평윤씨의 영향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것이다. 그러나 예론으로 인한 노소론의 분화와 회니논쟁이 시작되면서 노강서원은 소론계 사족들의 중심지로 부각되어 노론측 연산 돈암서원과 쌍벽을 이루게 된다.

 

출처 : 논산의 문화재, 논산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