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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서원(豚巖書院)

돈암서원(豚巖書院)

내용

돈암서원(遯巖書院)은 연산면 임리 74번지에 있다. 그림 응도당 

1634년(인조12년)에 창건하였으며 1660년(현종원년)에 사액되어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주향으로 하고 배향으로 신독재(愼
獨齋) 김집(金集),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 등 네 분을 모시고 (음) 3월, 8월에 문묘
석존의례에 따라 제향하고 있다.

돈암서원은 사계선생께서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이 선생을 추모
하며 기리기 위하여 사우를 건립한 뒤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
내며 내려오다가 사당 앞에 강당을 세우고 선생의 학문을 배우
며 서로 뜻을 이어 내려 왔다한다.

그 당시에는 현재의 연산면 임리 1구(숲말) 249번지에 있었는
데 원우 서북쪽에 돈암이라는 큰 바위가 있어 서원의 이름을 돈
암이라 하였다.

돈암서원에는 네 분의 위패를 모신 12간의 건물인 본전이 있
고, 양성당(養性堂) 10간, 유생을 가르치던 큰 강당인 응도당(Ꞧ
道堂) 24간이 있다. 장판각(藏板閣)은 사계, 신독재 선생의 전서
판목을 보관하던 곳으로 12간, 사계 선생의 도덕을 상징하여 만
든 산앙루(山仰樓) 누각이 있고, 정회당(靜會堂)은 8간의 건물
로 유생들의 휴식소였으며, 내삼문(內三門)은 4간으로 본전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외삼문(外三門)은 5간으로 본 서원의 정문이
다.

이곳의 건축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건물로 이곳의 한옥을 본
따 용인 민속촌에도 똑같은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그후 오랜 세
월이 지남에 따라 지대가 얕아 장마철에는 홍수가 뜰에까지 넘쳐
들어 1881년(고종 18년)에 현재 자리로 옮겨지었다.

그 당시 응도당은 구조가 아주 오랜 고대 가옥제도를 본 따서
지어 너무 크고 넓어서 옮겨 짓기가 어려워 사당 앞에 모형적으
로 세운 것이 현재의 강당이라 전해지고 있다.
양성당은 사계선생께서 건립하신 작은 강당이었는데 오랜 세월
이 지나는 동안 폐허가 되어 없어지고 강당 이름만 전해 내려온
것으로 이름 없는 빈 강당에 액자만 걸어 놓았던 것인데 이 강당
도 197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옛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 서원에는 조선왕조로부터 하사 받은 자색의 큰 벼루가 있는
데 포도의 조각이 되어 있고 문양이 우아하며 제사 때만 사용하
고 있다.

돈암서원은 대원군 때 서원 훼철령이 있을 때에도 철폐되지 않

고 남아 있던 서원으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