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메뉴 닫기
서브페이지 배경

이종일선생생가지 [李鍾一先生生家址]

이종일선생생가지 [李鍾一先生生家址]

소개

구 분  기념물 제85호 (1990. 12. 31 지정)
분 류  유적건조물/인물사전/인물기념/탄생지
소재지  충남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 809외 1필
시 대  일제감정기, 1987년 복원
규 모  넓이­3,183㎡
소유자  태안군
관리자  태안군

내용

 기미독립선언(己未獨立宣言)민족 대표 33인의 분이신 이종일(李鍾一,1858~1925)선생이 태어난 생가지(生家址) 목조(木造) 초가(草家) 이용한 장방형(長方形) 가옥으로 1987년에 복원(復原)되었다

 

이종일(李鍾一,1858~1925)선생의 () 옥파(沃坡) 또는 묵암()이며, 필명(筆名) 천연자(天然子), 중고산인(中皐散人),옥천자(玉泉子), 중헌(中軒), 삼일자(三一子) 등으로 썼다. 선생은1858 11 6, 성주이씨(星州李氏) 고사교환(高士敎煥) 장남(長男)으로 태어났다. 16 , 문과(文科) 급제하였으며, 1882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 함께 외교사절단(外交使節團) 일원(一員)으로 일본(日本) 다녀와 일본의 개화(開化) 문물을 접하게 되어 개화사상(開化思想)에도 힘을 기울였다

 

3(正三品)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되었으나 10 개월 만에 관직을 그만두고 구국(救國)운동에 앞장섰다

선생은 민중계몽(民衆啓蒙) 인재양성의 중요함을 깨닫고 흥화학교(興和學校) 국문학교(國文學校) 설립하고 1894년에는 보성보통학교(普成普通學校) 교장에 취임(就任), 후로도 7 학교의 교장을 역임(歷任)하였다

국어연구소(國語硏究所) 연구원으로 한글 발전에 공헌(貢獻)하였으며, 189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帝國新聞) 창간(創刊)하였으나, 일제(日帝) 의해 강제로 폐간(廢刊)되었다

황성신문(皇城新聞),대한민보(大韓民報)등에 재직하면서 일제의 회유와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제세구민(濟世救民) 정신으로 언론(言論)활동을 전개해 나가면서 수차례의 옥고(獄苦) 겪었으며, 대한협회(大韓協會),자강회(自彊會), 국문연구회(國文硏究會)등의 구국단체를 조직하고, 손병희의 권유에 따라 마침내 동학에 입교하여 교회일보(敎會日報) 통하여 구국의 종교사상(宗敎思想) 전파하였다

 

1919 2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최린(崔麟)등으로부터 3․1운동의 계획을 듣고 민족대표가 것을 결심하고,그가 운영하던「보성사」라는 인쇄소에서 독립선언서 원고를 조판(組版), 교정(矯正), 인쇄(印刷)하여 국내외에 배포하였다. 초판본(원본) 태안신월향토유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3 1 민족 대표의 사람으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낭독하고 일본 헌병(憲兵)에게 체포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르면서 일제(日帝) 혹독한 고문(拷問)으로 가출옥된 ,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 집필(執筆) , 19258 31 67세의 나이로 조국광복(祖國光復) 보지 못한 () 마쳤다

 

묘소(墓所) 서울 망우동에 조영(造營)되었다가 동작동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하였으며, 19623 1일에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복장을 추서 받았다.